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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최고의 선물 · 상편소설/예속의 개 목걸이 2020. 6. 23. 19:56
“지친다……”
일을 끝마치고 흐물흐물해진 몸을 질질 끌며 귀로에 접어든다.
가게의 특성상 잔업 같은 건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고 서비스업이다. 예상치 못한 트러블이 일어나는 일도 많고, 날에 따라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바쁜 날’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레벨이라서 그녀—— 플랑은 아주 지쳐있었다.
“이제 그만둘까, 이 일.”
그런 날도 가끔은 있다, 고 이해하고 있는 플랑이지만, 오늘만은 역시 불만이 튀어나왔다.
취한 손님이 싸움을 시작하거나, 오늘 들어온 알바생이 말도 없이 퇴근하거나, 누군가가 식재료의 발주를 실수해서 서둘러 상점가에 가는 등, 한 가지라도 일어나면 귀찮아지는 일이 오늘은 어째선지 계속해서 발생한 것이다.
“액일이었어, 오늘은……”
또다시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러고 있자, 앞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크고 예쁜 여성과 약간 어려보이는 용모를 한 소녀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도 볼을 붉히고 있어서 풋풋해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을 보나 지금부터 운치 있는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제길, 커플이잖아.”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작게 욕하며 플랑은 축 처졌다.
‘나도 여친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자신에게 여친이 있었으면 이렇게 일이 힘든 날에도 집에 돌아가면 위로받고 내일도 힘내자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쉬는 날에는 같이 뒹굴거리면서 지내기만 해도 즐거울 테고, 그리고 가끔은 사랑을 확인하며——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플랑은 점점 부풀어 오르는 망상을 떨쳐내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한다.
‘괜찮아. 나한테는 ‘그게’있으니까.’
다른 생각이라며 떠올린 것은 금고에 넣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몇 장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겨졌던 표정이 흐물흐물 풀어진다.
‘오늘은 그 사진으로 자위하고 자버리자. 그러면 피로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질 테니까.’
플랑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며칠 전에 갑자기 내려온 행운. 그렇다. 오늘이라는 액일과는 정반대의, 플랑의 인생에서 가장 운이 좋았던 날의 일이다.
‘그 애랑…… 또 만나고 싶다.’
그날 이후로 어떤 의미로는 매일 만나고 있다고 해도 될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의 모습과 카메라로 그것을 찍는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를 떠올리고, 또다시 표정이 흐물흐물 풀어진다. 그날의 음란한 광경은 지금도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있다.
‘하아…… 뭐였을까 그 사람들. 잡지 촬영이라는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런 잡지를 몇 권인가 가지고 있는 플랑이었지만, 소녀의 얼굴은 가지고 있는 잡지에서는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그 소녀의 반응은 그런 촬영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순진했다. 설령 신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가게에 허가도 받지 않고 촬영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고.
혹시나 하면 그때 플랑이 예상한 대로 협박을 당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양심이 약간 아파왔지만, 그래도 그 사진의 유혹에는 이길 수 없었다.
‘……그 애를 생각하는 바람에 약간 흥분해 버렸네.’
이런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흥분하는 건 상스럽다면서 자신을 억눌러보지만, 한 번 의식한 욕구를 멈추는 것은 어려웠다. 플랑은 주위를 둘러본 후, 평소에는 지나가지 않는 샛길에 눈길을 준다.
‘……오늘은 이쪽으로 갈까.’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데다 밤이라서 약간 무섭지만, 이쪽이 더 빠를 것이다. 평소에는 지나지 않는 길이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빠르게 집에 돌아가고 싶다.
빛이 흘러넘치는 큰길에서 떨어져 전등 하나 없는 골목길에 들어간다.
달빛과 별빛만이 비춰주는 길은 안 보일 정도는 아니어도 역시 어두워서, 잘 보고 걷지 않으면 위험했다. 어딘가에 발이 걸리지 않도록 확실하게 바닥을 확인하면서 걷는다.
“……응?”
하지만 골목길에 들어와서 1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플랑의 눈에 무엇인가 보였다.
이런 시간, 이런 장소에 사람이 걷고 있는 것이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에 키가 작은 소녀처럼 보였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만나다니.’
의외라서 앞에 있는 소녀를 자세하게 관찰한다. 그 소녀는 어째선지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왜 저렇게 경계가 심하지?’
수상쩍다는 마음과 호기심이 부풀어 올라, 더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자,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가 눈을 껌뻑인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 봐도 소녀의 얼굴은 플랑의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진짜로? 저 사람, 요전의 그 애잖아.’
틀림없다. 사진 속의 여자애다. 그 이후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사진을 봤던 플랑이다. 그녀의 얼굴을 잘못 볼 리가 없다.
‘어, 엄청난 우연이네. 왜 이런 곳에…… 그보다 뭘 저렇게 경계하고 있는 거지?’
사람이 적은 골목길에서 저렇게까지 주위를 신경 쓰며 걸을 필요가 있을까?
‘혹시…… 그 갈색 머리카락 애한테 쫒기고 있다든가……?’
그렇게 길게 본 것은 아니지만,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명백하게 힘의 차이가 있어 보였다.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위고, 저 소녀가 아래다. 그때도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의 지시에 억지로 부끄러운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뒷골목에 있는 것도 납득이 간다.
‘……그, 그러면 어떻게 한다.’
망상 추리는 그 정도로 해두고 그 자리에 선다. 과연 자신은 발견한 소녀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당연히 들키기 전에 돌아가는 게 가장 좋지.’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 외에는 없다.
과정은 어쨌든, 플랑은 그녀를 괴롭힌 가해자 쪽의 인간인 것이다. 만약 붙잡혀서 병사에게 내밀어진다면 벌금, 혹은 감옥살이까지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애와 만날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아무리 그 사진이 훌륭하더라도 실물이 눈앞에 있으면 사진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어느샌가 플랑의 발은 멋대로 속도를 높여, 앞을 걷는 소녀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저기——”
“……히익!?”
말을 건 순간,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쭈뼛쭈뼛 뒤를 돌아보고는,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소설 > 예속의 개 목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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